총선이 끝나고, 각 정치세력들은 국민으로부터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대부분의 예상과는 다르게 박근혜가 이끄는 새누리당은 과반을 점유했으며, 기세등등하던 민주통합당과 진보 소통합에 성공한 통합진보당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좌클릭이 원인이다, 아니면 야권연대의 잡음이 원인이다, 아니면 공천이 문제다, 친노의 전횡이다, 486의 구태 정치다, 언론 장악이 원인이다, 이 외에도 끝도 없는 원인의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며, 아마도 그 '분석'은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스탠스에 맞춘 해석일 것이다.
나는 조금 부분적인 차원에 집중하고 싶다. 바로 19대 총선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진, 마치 '20대 개새끼론'의 거울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개새끼'를 '표심'으로 바꾸고 싶어한 일련의 '청년 정치'에 관해서이다. 나는 왜 20대를 포함한 많은 정치 키보드워리어들이 이 문제에 이렇다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현실 정치를 바라보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부분들이 이 '청년 정치'의 흐름과 파국에 존재할 거라고 본다.
몇 가지의 화두를 던져보자.
1) 청년이라는 계층은 정말로 실존하고 있는가?
2) 청년이라는 계층이 실존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 계층인가?
3) 청년'의 정치'와 청년'을 위한' 정치는 같은가?
일단 이 화두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답을 해 보겠다.
1) 청년이란 계층은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존하지 않을 것이다
2) 그 계층은 실존하지 않으나, 청년이라는 '생물학적 집단'의 '다수'가 원하는 것은 분명 있을 것이다
3) 둘은 '명백히' 다르다
이 화두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밀어두고, 간략하게 19대 총선에서 벌어졌던 청년 정치를 검토해 보자.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각기 경쟁적으로 '청년 비례대표'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공개 오디션을 벌였다. 물론 민주통합당의 경우 막상 4명의 당선자를 뽑아놓고서 2명을 당선권 바깥에 두는 토사구팽에 가까운 기묘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통합진보당은 지금 초유의 일을 벌이고 있는 '김재연'이라는 인물을 내놓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청년'이라는 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떤 집단에 대해서 야권이 열렬히 구애를 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야권은 그렇다 치고, 여권은 이런 청년 비례대표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데려온 것은 '이준석'이라는 기묘한 인물뿐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야권의 '청년 국회의원'과는 전혀 다르게, 이 여권의 '비대위원'에 불과한 인물의 정치에서 보여주는 유능함은 (비록 백업이 다 있지만) 다른 '청년 정치'의 표상들을 압도하고 있다. 마치 총선 결과처럼!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오히려 어떤 면에선 이준석과 민통당의 2명의 청년 의원, 그리고 통진당의 김재연은 정확히 총선과 정당 정치에서 보여주는 '교활함'과 '무능함', '뻔뻔함'으로 상징되는 각각의 정당 특성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되돌아가서, 그렇다면 '청년'이란 계급은 실존하는가? 내가 보는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단지 사람들은 청년이라는 계급을 '자신 주변의 청년'을 보고서 생각해낼 뿐, 그런 계급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귀결이다. '계급적 논의'에서 중요한 건 근본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부와 경제력이지, 그 사람의 나이가 얼마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부자는 부자일 뿐이며, 빈자는 빈자일 뿐, 청년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계급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은 청년이라는 이미지에서 우리 주변의 '중산층 가족의 4년제 대졸 사회 초년생'을 떠올리며(실제로도 분명 이들은 청년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긴 하다) 실제로는 계급이 아닌 생물학적 분류에서 어떤 사회 계급적인 이미지를 막연히 도출해내고 있을 뿐이다.
두번째 화두에 대한 접근도 사실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청년이라는 계급이 실존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는 분명 한국의 청년들 중 다수가 부자 부모를 두지 않았으며,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임을 알고 있고, 또 그들 중 다수가 평범한 학벌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 중 다수가 앞으로 그다지 상대적으로 유리하지 않은 고용조건의 직장에 취업하게 될 것임을 알고는 있다. 즉 우리가 청년이라는 계급이 실존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청년을 위한 정책'이라고 정치적 레토릭으로 삼을 수 있는 뭔가는 분명히 있단 뜻이다. '반값등록금'이든 뭐든.
문제는 세번째 화두이다. 19대 총선에서 야권이 아주 경쟁적으로 벌인 일련의 '청년 정치'는, 과연 최종적인 목적지가 무엇인가? 이는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청년 정치는, '청년에 의한' 정치인가, '청년을 위한' 정치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 아닌가'? 나는 이런 종류의 정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것보다는 좀 더 저렴한 차원에서, 청년이 자신들과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원내 정치의 판에 정치세력들이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을 통해, '표심'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청년이라는 계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가 동의한다면, '청년 정치'라는 단어는 쉽게 말해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야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청년을 위한 정책도 내놓았고, 또 그런 일반적인 청년'의' 자리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 기성 정치 세력의 시도가 정녕 청년이라는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은 계급을 원내 정치의 영역으로 퍼올려 사회의 좀 더 다양한 계층을 대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새롭게 발굴된(발굴될 것 같은) 표심을 위해서, 정치세력들은 일종의 낚시바늘을 드리운 것이다.
심지어, 청년이라는 생물학적 계층의 다수가 어떤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한들, 그것은 '청년의 손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반값등록금은 명백하게 한국 사회의 사학 권력과 양극화라는 거대한 문제의 한 단면이며, 높은 주거비 역시 부동산이라는 거대한 문제의 한 단면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청년(이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편의상 이런 단어로 퉁치고 넘어가도록 하자)이 겪고 있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정치판에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건 있다. 청년의 이해관계를 국회 안에서 주장할 의원이 상징적으로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지, 청년의 문제를 청년이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아닌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심지어 청년은 '노동자'와 같은 어느 정도 공통되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력도 아니며, 청년 개개인이 가진 계급적 이해는 그저 '부모의 계급'을 다른 각도로 대변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청년 비례대표 몇 명을 뽑는 것은 오히려 그런 청년 중 다수가 느끼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 아니라, 원내에서 표출시켜줄 사람들을 몇 명 만드는 것을 통해 청년에게 정치적인 희망(망상일 수도 있고)을 심어주는 것을 통해 표심을 다지려는 것이 근원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왜 청년 비례대표니 위대한 진출이니 하면서 그토록 청년 정치를 해 보겠다고 난리를 친 결과는 심지어 국회의원조차 아닌 이준석에 비해서조차 전혀 존재감이 없거나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후보들을 뽑는, '파국적 결과'로 향해야 했는가?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야기는 있을 수 있다. 사실 이준석은 그다지 젊은 이미지를 주고 있진 않으며, 야권이 정파적 이해 때문이든 실제로 인재를 보는 눈이 없어서든 그다지 쓸만한 사람을 뽑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야권의 청년 정치는 분명 '망했'다. 내가 보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청년이란 계급의 비존재
2) 도외시된 전문성
3) 역선택의 문제
4) 정보의 부족
청년이란 계급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여러 차례 앞서 밝혔다. 물론 우리는 야권이 밀은 1%-99% 담론이나, 아니면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서민과 중산층(서민과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레토릭을 빌리면 나름대로의 '청년'이란 계층이 아닌 '계급'을 머릿속에서 만들어낼 수는 있으나, 뭐가 어쨌든 '청년 비례대표'는 그저 나이가 그에 해당하는 것일 뿐, 청년이라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런 청년 비례대표가 얻어낼 수 있는 '근본적인 대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년 비례대표를 뽑는 과정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또 하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직업적 정치인이 갖는 전문성을 이 일련의 오디션 과정이 완전히 도외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1번 김순자 후보와도 좀 관계가 있다. 우리는 국회의원들의 재산을 보며 그들이 진짜 서민의 삶과는 도외시되어 있는 집단이라 욕하는 것을 즐기지만, 동시에 국회의원이 '무지렁이'가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즉 국회의원이 갖게 되는 특성은 자신의 사회적,계급적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면서도 분명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람들보다는 유능해야 하는, 대단히 모순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노동자가 하든 장애인이 하든, '유능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직업적 정치인만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유능함(그것은 정견,정책,연설능력,문필능력,하다못해 외모도 포함된다)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하고 그런 것에 대한 검증을 유치한 자기소개 PT와 간단한 약력으로 대체했으니, 새누리당이 마음먹고 픽업한 이준석에 비해서 당연히 정치적 유능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다.
역선택의 문제도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 청년에게 있어 분명 청년 비례대표는 끌리는 개념이긴 하지만, 당선 가능성과, 정치인으로서 거머쥐고 싶은 권력과 부의 실현가능성과 그 양이라는 차원에 있어 과연 야권이 유리한가? 즉 이런 비례대표에 도전할 가망이 높은 정치 지망생들에게 있어 과연 야권은 매력적인가? 프로팀에서 잘하는 선수의 연봉이 높은 것은 그 선수가 잘 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잘 하는 선수'(잘 할 것 같은 선수)를 영입하는 데 있어 많은 돈을 주지 않을 경우 그 팀에 선수가 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근/본/적/으/로 유능한 인물은 자신이 얻을 곳이 많은 데에 간다. 물론 신념에 따라서 가시밭길을 걷는 사람들도 많지만(진보 언론에 종사하는 많은 박봉 기자들을 보라), 그것은 그들이 절대적인 숫자가 적기에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기사 잘 쓰고 논리가 정연한 사람은 박봉을 받고 일하지 않는다. 이는 정치 지망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제기하려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런 청년 비례대표를 뽑아야 할 유권자들이 그들에 대해서 너무나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상식 선에서 생각해 보자. 그런 유권자들이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도 서류 전형을 거치고, 1차로 적성검사를 거치고, 2차로 면접관과 면접을 거치며, 3차로 합숙 면접이든 임원 면접이든 또 거친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국가 전체에 있어 중요한 국회의원을 뽑는 데 있어, 고작 10분짜리 PT와 후보의 얼굴, 그리고 이력만을 가지고 무슨 수로 유권자들이 식견을 판단하고 검증을 하겠는가? 심지어 그 유권자들은 앉아서 TV 보는게 낙이신 60~70대와는 달리, 평소에 많은 종류의 활동을 하고 산다. 그런 가뜩이나 바쁜 이들에게 수십명이나 되는 후보들의 자기 소개 PT를 일일이 읽어보고, 정견을 듣고, 판단을 하라는 것이 애초에 말이 되는 주장이겠는가? 결국 싸움은 선거인단으로 등록 가능한 인맥과 조직, 그리고 야당 간부들이 주는 점수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애초에 구조적으로 정보가 부족하니, 작정하고 전략적으로 뽑아올린 상대편 인물에 비해서 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순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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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이 이번 총선에 벌인, 청년 비례대표로 상징되는 일련의 청년 정치가 파국을 맞는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나는 애초에 이런 수많은 내가 생각하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그다지 유효하지도 않고 재미조차 없는 정치적 엔터테인먼트 쇼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일련의 쇼가 맞은 결과에 대해서는 분명 정치세력이든, 지지자들이든 교훈을 얻을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청년은 분명 그 계층에 있어 어떤 지배적인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계급적/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는 있는 집단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해결해줄 사람이 청년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이 갖고 있는 이해관계와 문제들은 그다지 '청년'이라는 특수성에 의해서 겪는 문제가 아니며, 한국의 사회와 경제 구성원 전반에게 각기 조금씩 다르게 적용되는 문제 중 일부분이다. 청년이라는 계층이 정치세력과 소통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청년 비례대표'에 의해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적당한 시스템에 의해 뽑히지 않은 청년 비례대표로 상징되는 청년 정치는 한심한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어리다'는 것은 손수조의 예만 보더라도, 그다지 장기적으로 어필 가능한 개념이 절대로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젊냐 젊지 않냐늘 떠나서 많은 집단들의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정확히 짚어내고, 효율적인 전략을 통해 자신들이 그 문제를 짚어냈음을 어필하고, 나아가 그 문제를 적당한 조율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해 주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잘 검증되고 식견을 차근차근 쌓아올린 정치인이다.
그러나 이런 기상천외한 '청년 정치'의 근원은 이런 작업을 수행했어야 할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불신감과 혐오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안철수는 생물학적인 나이가 젊어서 안철수 현상을 일으킨 것이 아니며, 모든 작업은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지 무턱대고 어설픈 룰로 청년 몇 명을 픽업해서 '청년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현재의 한국 정치, 한국 사회, 한국 경제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내게 있어 야권이 밀어댄 청년 정치의 파국은 정해진 것이었으며, 또한 정치 세력들은 이벤트를 벌이려면 이벤트답게 벌이든지, 아니면 이런 정략적 꼼수를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밝히며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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